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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뱃돈과 세뱃글
 
최민호   기사입력  2019/02/01 [17:47]
▲ 최민호 前 국무총리 비서실장     ©


설날 이른 새벽.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세배드리러 가는 아침이다.

이 설레임, 이 신선함, 이 새로운 경건함.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래 너도 건강하고 금년에는 소원성취하거라.'

 

그리고 받는 세뱃돈.

세상 어느 나라에 이렇게 아름다운 풍습이 있을까.

새해 첫날 어른들에게 공경과 축복을 기원하는 세배를 드리고 덕담과 용돈을 받는 이 풍습이야말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도 좋을 고품격의  풍속이다.

세뱃돈은 많이 받을수록 좋았다.

세뱃돈 받고 입이 함박만해지는 동심이야말로 설날 아침같이 맑고 순수하지 않은가.

 

세뱃돈이 어디서 유래되었는가가 궁금해졌다.

절을 하고 돈을 받는 풍습이 동방예의지국의 오랜 전통은 아닌 것 같아서였다.

문헌을 찾아보니, 제웅이라는 짚으로 만든 인형에 액을 담아 섣달 그믐날 길바닥에 던져두는 풍속이 있었는데 걸인들이 줍게 뱃속에 동전을 담았다. 그리고 자기 집 아이들에게는 제웅을 줍지 못하도록 세뱃돈을 주었다는 설이 있었다.

마음 한 구석이 어쩐지 개운치는 않았다.

 

문헌을 더 찾아보니, 양가 댁에서는 세뱃돈을 주지 않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선비 집에서는 집안 어른에게 세배가면 벼루를 앞에 놓고 글을 써서 봉투에 넣어주었다는 것이다. 대개 아이에게 훈계가 되는 글이 쓰여 있었다.

외자면 일자훈(一字訓), 세 자가 씌었으면 삼자훈(三字訓)이라 했다.

세배를 하면 글을 교훈으로 내려주었던 것이다.

 '세뱃글'이라 했다.

이것이다 싶었다.

 

일자훈(一字訓)으로는 소 우(牛)자가 대표적이었다고 한다. 소같이 우직하고 신중하라는 근신의 훈이 담겨있었다.

삼자훈(三字訓)으로는「행중신 (幸中辛)」이라는 것이었다.

행(幸)자 속에는 맵고 쓰라릴 신(辛)자가 들어 있음을 가르쳐주는 교훈이었다. 행복이란 반드시 쓰라린 역경과 좌절을 겪고 극복했을 때 얻어지는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인중도(忍中刀)」라는 글도 있었다. 마음이 흐트러지려 하면 손가락으로 그 글자의 칼날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마음을 다스리라는 것이었다.

얼마나 그윽하고 멋진가. 기품과 뼈대있는 동방예의지국의 풍습이었다

 

이것을 읽은 지가 20여년 전이었다.

나는 세뱃글을 써주기로 마음먹었다. 전통을 살리고 싶었다.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아내에게도 지난 한 해의 고마움과 올 한해도 행복하게 살아보자는 축복의 글을 주면 좋아할 것 같았다.

그로부터 해마다 까치설날이면 나는 세뱃글 쓰기에 바쁘곤 했다.

글쓰는 재주는 없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하기도 했다.

그러나 1년에 단 한번 아버니로서 가족들에게 해주고 싶은 덕담을 글로 써주는 것도  못하랴 싶었다. 

 

설날 아침.

아내와 먼저 세배를 나눈다. 가장 소중한 부부간에 축복과 건강을 비는 세배를 못할 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마움과 쑥스러운 결심을 적은 '세뱃글'을 전한다.

세뱃돈도 넣는다. 아내도 세뱃돈을 좋아하니까..

 

다음 아이들이 세배를 하면 세뱃돈과 세뱃글이 들어있는 봉투를 내려준다. 아이들은 봉투를 받아들면 세뱃글에 손이 먼저 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이들은 매년 내가 써 준 세뱃글을 모아서 간직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세뱃글은 점점 길어지고 어른의 문체로 바뀌어 갔다. 세뱃글은 아이들 성장의 역사요, 아버지가 주는 축복의 자취가 되어가고 있었다.

 

새해 아침에 주고받는 덕담과 글들.

말로 하는 수 없는 감사와는 비할 수 없는 신선한 감동이 흰 눈 쌓이듯 내 마음에 쌓여져 왔다.

새해 첫날.

우리는 세뱃글로 한 해를 연다.

글이 들어있는 흰 봉투를 열면서 우리는 가족들의 건강과 행운을 비는 축복의 신기원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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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2/01 [17:47]  ⓒ 대전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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