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마지막 첫사랑
 
동화작가   기사입력  2017/10/13 [14:51]


마지막 첫사랑

1.

 
어린이 집에서 요양원 노인들을 위해 위문잔치를 왔나 보다.
노란 병아리 옷을 입고 어린 것들이 재재거리며 요양원 앞뜰에서 재롱을 피우고 있다. 
 
‘귀여운 것들···’
 
잘 나오지도 않는 발음으로 노래를 부르고 무용을 한다. 
뽀얀 살갗하며, 초롱초롱한 눈동자들.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하트모양을 그리며 열심히 재롱을 피운다. 
얼마나 앙증맞은지···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것들···’
 
의자에 걸터앉거나 휠체어에 앉은 사람, 기둥에 기대 선 사람··· 
할머니들은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 것도 모르고 어린 것들의 재롱을 구경하고 있다. 같이 손뼉을 치거나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장단을 맞추어 주기도 한다. 귀여운 손주들의 재롱을 보면서 모두들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머금고 있다. 가장 행복했던 옛날을 잠시 회상하게 된다. 
품 안의 자식들이 응석떨며 재롱피던 잊지 못할 그 시절···
 
재롱잔치의 마지막 순서는 비누거품 풍선불기였나 보다.
선생님의 지시에 어린이들이 비누거품놀이 용기를 모두 꺼내 대롱에 비누를 묻혀 하늘을 향해 후우 불었다. 
 
방울방울···
많디 많은 무지개 빛 풍선들이 하늘로 너울너울 올라간다. 
장관이다. 예쁘다. 노인들은 모두 동심으로 돌아간다. 
거품을 불던 어린이들이 우!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달려온다.
 
“함머니, 하부지. 같이 불어요.”
 
하면서 비누거품 용기를 노인들에게 나누어 준다. 
노인들도 모두 대롱에 비누거품을 묻혀 하늘에 대고 후우 분다. 
방울 방울 방울···
아까보다 더 많은 비누거품 풍선이 하늘하늘 날아 올라간다.
파란 하늘에 둥근 방울꽃이 무수한 무지개가 되어 여기저기 피어오른다. 풍선들은 곧 터진다. 그러면 아이들과 노인들이 또 대롱을 후욱 불어 작은 무지개 풍선들을 하늘로 띄운다. 
노인들은 모두 어린이가 된다. 소년 소녀가 된다. 청춘이 된다. 
풍선이 된다. 
 
뜰 한 쪽에서 휠체어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어린 것들의 재롱을 보던 백발 할머니는 비누거품 방울이 파란 하늘로 올라가 떠다니는 모습을 보자 입가에 미소가 조용히 떠올랐다.
 
파란 하늘··· 
푸른 잔디···
긴 벤치···
 
벤치에 앉아 비누 거품풍선을 만들어 불던 아련한 추억이 떠올랐다. 
봄날이었지.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비누 풍선이 더 높이 올라 금방 터지곤 하였지. 그래서 더욱 자주 대롱을 불어야 했었어. 
깔깔 거리며··· 
그러다가 스르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곤 했었지. 
 
백발 할머니는 휠체어를 밀고 한 어린이에게 다가갔다. 
어린 것은 쪼르르 비누거품놀이 하나를 할머니에게 주었다.
 
‘후후우.’
 
잔디 밭 맞은편에서도 휠체어에 앉아 할아버지가 비누거품 풍선을 만들어 불고 있었다. 숱이 많지 않은 흰 머리를 곱게 빗어 뒤로 넘기고 검은 칼라의 하얀 셔츠를 입고 비누방울 풍선을 만들어 하늘에 대고 후우하고 날려 보내고 있었다. 
눈은 감았는지 반쯤 떴는지··· 
 
모처럼 노인들은 모두 요양원 숙소에서 나와 어린이들의 밝은 재롱으로 한껏 기분이 밝고 화창한 봄날을 즐길 수 있었다.
이런 날이 아니면 노인들끼리도 함께 얼굴을 대할 수 있는 기회란 별로 없었다. 마음이 밝아지니, 서로서로 얼굴을 보면서 인사도 나누고 말도 건네는 명랑함도 되살아난다. 
 
백발 할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어린애같이 거품풍선을 불다가, 맞은편에서 거품을 불고 있는 흰 셔츠의 휠체어 할아버지를 얼핏 보았다.
눈을 반쯤 감고서 한방울 한방울 거품 풍선을 만들어 불고 있는 노인의 얼굴은 사뭇 진지하면서 회상에라도 잠긴 듯 고즈넉하였다.
왼쪽 관자노리에 있는 검은 사마귀···
 
백발 할머니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다시 쳐다본다.
왼쪽 관자노리에 검은 사마귀···

 
2.
 

어린 것들이 놀러온 후부터 백발 할머니가 요양원 앞 뜰 벤치에 앉아 비누거품으로 풍선을 불며 구름 같은 표정을 지으며 시간을 보내는 일이 점점 길어졌다. 
 
“할머니가 밖에 나가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좋은 일이죠? 선생님.”
 
“그럼. 좋은 일이지요.”
 
요양원의 간호사와 의사 선생님은 커튼을 살짝 열고 창문사이로 백발 할머니를 엿보면서 말했다.
“그래도 여전히 아무하고도 대화하지는 않아요. 늘 방에서 혼자 텔레비전만 보는 것 보다는 낫겠지만··· 
CNN과 NHK를 틀어놓고 보아요. 이해하니까 보는 것 아니겠어요? 
옛날에 외국에서 꽤 공부를 많이 하신 분 같기도 하고··· 
궁금한 분이예요. 아무튼 미스터리예요. 희한한 분이세요.”
 
여기는 중산층 이상 노인들이 들어와 살고 있는 실버타운.
 
요양원이라고는 하지만, 품격있는 생활공간과 병원, 헬스시설, 쇼핑 센타, 극장까지 고루 갖춘 쾌적한 실버 시니어들의 케어 홈이다.
입주자들의 형편에 따라 방 크기나 시설이 다르긴 하지만, 비교적 프라이버시와 품위가 보장되는 곳이었다. 
 
입주자들은 대체로 만족도가 높았다. 
시설 관리도 잘하지만, 주변경관이 수려하고, 무엇보다 입주자들의 수준이 여유가 있는 층들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기품있는 평온이 있었다. 여유로운 안식이 있는 곳. 
 
몸과 마음을 다 내려놓고, 인생의 황혼을 갈무리하면서, 처음 왔었던 어머니의 태반 속 같은 고요함과 편안함으로 다시 돌아가는 마지막 여로에 서서, 텅 빈 마음으로 자비로운 그 분의 손길을 기다리는 곳. 
날마다 새로운 아침햇살에 감사드리며,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각별한 인사와 미소를 잊지 않는 곳.
 
백발 할머니도 다른 노인들과 다름이 없었다. 
다만,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해서인지, 다른 노인과 별반 왕래가 적을 뿐, 텔레비전과 책을 주로 보면서 상념에 빠지는 일이 많았다.
 
백발 할머니의 과거는 요양원 직원들 사이에 심심찮은 화제거리였다. 
 
경제적 여유도 있어 보이고, 인텔리겐차의 풍모가 있어, 대하기가 쉽지 않은, 그러면서도 사연이 있을 듯한, 분위기 있는 노인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꽤 미인소리를 들었을 법한 외모, 희미하게 바랬지만 이지적인 눈빛, 고급스런 취향.
늘 외국방송을 시청하고 있는 모습.
분명히 왕년에 한 가닥 했던 사람이라고 누구든지 느끼곤 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진료기록이나 명세서에 그녀의 배경에 대한 것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의사와 간호사도 백발 할머니에게는 더 신경이 쓰였다. 
 
최근 들어 바깥출입이랄까, 야외에서 눈에 많이 띄었다. 
잔디밭 벤치에서 무엇인가를 회상하거나, 누구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으로 비누방울 거품대롱을 손에 들고 후우 불며 앉아 있기도 했다. 
어린이 재롱잔치가 끝나고부터 생긴 작은 변화였다. 
 

3.
 

좋은 날씨였다. 
여기저기 노인들이 잔디 정원에 나와 햇볕을 쪼이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곳의 한 벤치에 백발 할머니가 있었다. 
밝은 성격의 젊은 간호사가 경쾌하게 다가와 벤치에 혼자 앉아 비누풍선을 불고 있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할머니. 
비누거품 풍선이 재미있으세요? 손자 생각나시나 봐요. 매일같이 비누 풍선부시는 것 보면··· 손주들 얼굴이 풍선 속에 있나 보죠?“
 
할머니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럼 옛 애인 얼굴이라도 있으세요? 풍선 속에?”
 
하면서 간호사는 까르르 웃었다. 
백발할머니가 그 애기를 듣더니 간호사를 가만히 손짓으로 불렀다. 
귀를 가까이 대고선, 
 
“간호사 언니 부탁이 하나 있어요···”
 
“무슨 부탁이요?”
 
할머니는 들키면 안된다는 듯이 손가락을 작은 동작으로 가리키면서, 
 
“저기 저기, 저 할아버지 이름 좀 알 수 없을까?”
 
하면서 잔디밭 맞은편에서 혼자 휠체어에 앉아 조는 듯, 생각에 잠겨있는 할아버지를 가리켰다. 
간호사는 할머니가 가리키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흰색 드레스 셔츠에 검은 칼라를 하고 있는 할아버지였다. 
간호사는 이내,
 
“아, 저 할아버지요. 바오로라고 하시는 분. 저 분요?”
 
하는 것이었다. 
 
“바오로?.. 본명은 뭔데? ” 
 
“본명은 저희들도 몰라요. 아시다시피 여기서는 본인이 제출하는 신상명세 외에는 알 수가 없잖아요. 그냥 바오로 어르신이예요.”
 
“바오로···바오로···”
 
천주교 신자라는 세례명 외에 더 알 길이 없다. 
할머니는 낭패라는 듯 중얼거리며 밝았던 표정을 거두었다.
간호사는 비밀이라도 엿본 듯이 할머니를 살피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는 이튿날.
눈치 빠른 간호사는 오늘도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할머니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바오로 할아버지의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할머니, 할머니, 오늘은 비누거품 풍선 안 부세요?”
 
가볍게 던지듯 말을 건네며 간호사는 검은 칼라 할아버지를 할머니에게 가깝게 접근시켰다. 마치 두 노인의 로맨스를 성사라도 시키려는 듯 세심하게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바오로 어르신이라는 노인은 백발 할머니를 넌지시 건네 보았다.
무심하면서도 자상한 눈길이었다. 
간호사는 두 노인의 눈길을 유심히 살폈다. 
 
백발 할머니의 눈길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오로 노인의 눈길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살짝 비켜가는 옆눈길로 보면서, 뺨에 분홍 빛 홍조가 설핏 물들고 있었다. 
흔들리던 눈빛은 노인의 왼쪽 관자노리의 검은 사마귀에 꽂혔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반갑습니다.”
 
말을 먼저 건넨 것은 바오로 노인이었다. 
 
“예. 처음 뵙네요. 안녕하세요?”
 
젊은 간호사는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었고, 두 노인은 노인들끼리 나눌 수 있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날씨가 어떻고, 식사는 하셨는지등···
 

4.
 

먼저 관심을 보였던 백발 할머니, 송원희는 흔히들 대화의 첫머리에 말하고 물어 봄직한 이름을, 간호사에게만 살짝 물어보곤 정작 바오로에겐 묻지 않았다. 
저쪽 이름을 물으면 이쪽도 이름을 말해야 하는 고로···
 
그렇지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름을 물을 필요가 없어지는 것 같았다. 
목소리···
변함이 없었다. 그 목소리 같았다. 
50년이 지난 지금, 외모는 알아 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 목소리였다. 간간히 섞여 나오는 어투까지도··· 
 
최광호.
틀림없었다. 
송원희는 그 목소리를 듣자,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멎을 것만 같았다. 서둘러 대화를 마치고 방에 들어왔다.
 

5.

 
최광호.
그 남자가 이 요양원에···
마지막 생을 마감하는 이곳에서 그 남자와 다시···
잊을 수 없는 첫 사랑의 남자.
사랑의 배신.
살아왔던 인생의 어느 순간에서도 잊혀지지 않던 배신의 순간과 그 쓰디쓴 아픔.
 
송원희는 믿어지지 않게, 70이 넘은 이 나이에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뛰었다. 머릿속에 만 가지 추억의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편집되기 전의 필름처럼 전후도 없고 두서도 없이 마구 머릿속에 떠올랐다간 지워지고, 다시 상영되었다간 꺼지곤 했다.
 

6.
 

대학 1학년. 
생물학과 친구의 소개로 최광호를 만났을 때, 소개한 친구를 저주했었지. 저런 남자를 소개하다니···
볼품없는 외모에 지방출신, 대학도 나만 못하고···
세련미도 없는 주제에 여자에 대한 매너도 없던 남자. 그건 나를 무시한다는 것이겠지. 역겨운 담배를 연신 피워가며···
 
명문여고, 명문대학, 대기업 CEO의 딸로, 곱상한 외모를 가진 나는 미팅에 가면 언제나 최고의 퀸 카드였다.
그런 내가 제일 싫어하는 파트너가 있다면, 바로 막걸리나 마시며 촌놈 말투에 여자 무시하는 남자였다. 
바로 최광호 같은 남자였다. 
거기에 관자노리에 있는 볼썽 사나운 점. 
 
그렇게 덜 떨어진 촌놈인 그 남자와 한번 만난 후로는 우연찮게 자주 보게 되었다. 과 친구들과 맥주집에서 치맥이라도 할라치면 이상하게 동석이 되곤 했었다. 
최광호의 친구들이 우리 과에 많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여자들에게는 영 매너제로인 최광호는, 그의 친구들과 만날 때면 조금 달랐다. 친구들은 그를 대하는 것이 무언지 달랐다.
말하자면, 최광호는 대학 1학년짜리가 그 나이에 보일 수 있는 천방지축의 장난기나 치기가 없었다. 그렇다고 철학가나 문학가연 하는 궁상을 떠는 것도 아니었다. 친구들과 긴 말은 없었지만, 가끔 던지는 말에 위트와 촌철살인의 핵심이 있었다. 친구들 사이에도 무시하지 못하는 어떤 기품같은 것이 있었다. 
 
이런저런 계기로 그와 몇 번 만나면서 느낀 점은, 대화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같은 나이에, 같은 교육부 교과과정을 거쳐 대학에 들어왔건만, 그는
나로서는 들어보지도 못한 이야기를 세상의 상식인 양 천연스럽게 늘어놓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요. 노벨 문학상을 받고 74세에 자살을 한 이유가, 사람들은 미시마 유키오라고 하는 제자가 할복자살한 것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를 시중들던 젊은 여인과의 연정을 못이겨 자살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믿어집니까? 
소포클레스는 노인이 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어 행복하다는 이유로 바로 성욕으로부터 해방된 자유 때문이라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
 
나는 솔직히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누군지, 미시마 유키오가 어떤 사람인지 캄캄하게 모른다. 소포클레스라는 이름은 어디서 그리스의 극작가라고 본 것도 같지만··· 
생뚱맞은 화제지만, 호기심에 끌려 그의 이야기에 귀룰 기울이다 보면 내가 자꾸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나와 같은 대학 1년생이 아닌 것 같았다.
화제와 관심이 달랐고, 흔히 생각없이 지껄이던 시답지 않지만, 우리끼리의 화제거리들이 그의 앞에 나오면 갑자기 내가 그간 쓰레기나 주워먹었던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했다. 
달랐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도 그에게는 대하는 것이 달랐던건가?···
 
그에게는 묘한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구석이 있었는데, 당시는 그것을 호기심이라 하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바로 지적인 매력이었다.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돌. 
그를 만나다 보면, 작고 못 생겼던 돌이 점점 커져 바위가 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잘 다듬으면 큰 산맥을 이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어느 봄날의 헤프닝이 있고 부터였다. 
 
그 날, 오전 첫 수업이 끝나고 과 친구들과 다함께 커피를 마시고 다음 강의실로 모두들 재잘거리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 때 눈에 띄는 강의실 문 앞을 지켜 서 있는 그. 
 
갑작스런 그의 출현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직 사귀고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내심 당황스러웠다. 
저자가 지금 왜 저기에 서 있는 거지?
강의실 앞에 서 있던 그가 나를 발견한 모양이다. 무리를 지어 강의실로 들어가려는 우리 친구들 사이를 비집고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선포라도 하듯이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내 친구들이, 절반이 남학생이었는데, 다 보는 앞이었다. 
 
“송원희씨, 지금부터 송원희씨를 납치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내 팔을 잡고 강의실 밖으로 끌고 나가는 것이었다.
너무도 창피하고 어찌 할 줄을 몰라 나는 속절없이 그의 팔에 끌려 나왔다.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는 나의 친구들···
남학생들···
그러나 용감하게 그를 제지하는 사람은 그 중에 아무도 없었다. 
졸지에 나는 숨은 남친을 둔 내숭으로 소문날 수밖에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나였다. 
속절없이 따라 나오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좋았다!
그가 높은 산 같이 여겨졌다.
 
그 따뜻한 봄날, 그와 공원벤치에 앉아 데이트를 하고,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았다. 나름 재미있었다. 
헤어지면서 그는 나에게 조그만 선물을 하였다. 
나무로 만든 작은 군화 한 쌍이었다. 
 
“걸레가 더럽다 하지만, 더러운 것은 마루바닥이지요. 더러운 바닥을 치우기 위해 깨끗했던 걸레가 더러워진 것을 보고, 사람들은 걸레가 더럽다 하는군요. 
이 군화가 더러운 것을 밟으며 송원희씨의 예쁘고 깨끗한 발을 지켜줄 것입니다.”
 
나는 그 작은 군화를 곱게 간직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함몰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앞에 서면 나는 말이 없어진다. 자꾸만 작아진다. 그리고 없어져버린다···
 
방학이 되면 그는 부모님이 있는 고향 시골로 내려가 버린다.
핸드폰도 전화도 자유롭지 못한 시절, 몇 개월이나 만날 수 없다는 것이 그리도 안타까웠다. 
나는 기차를 타고 내려가는 그에게 명령하였다. 
매주 월요일이면 도착되게 편지를 써서 올리라고···
그리고 그는 겨울방학이 끝나는 3개월을 한 번도 빠짐없이 편지를 써서 보냈다. 
 
“월요 이야기”
 
라는 제목을 붙이고, 1편, 2편이라는 식으로 시리즈를 만들어 온갖 이야기를 써서 보냈다. 
시, 수필, 소설, 논설···
그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방학이 끝나고 모은 그의 편지모음은 A4 클리어 파일 한권 분량이었다. 편지들의 그 기발한 내용과 재미, 그리고 그 은밀함···
그토록 열렬하였다. 
 

개학이 되자 나는 주저할 것이 없었다. 
그와의 데이트는 언제라도, 무엇보다도 우선이었다. 
나는, 볼펜을 잡으면 그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비누거품 대롱을 불면 비누 풍선 속에 그의 얼굴이 있었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어린아이 같이 비누거품을 누가 더 크게 만드는가 시합을 하곤 하였다. 
그는 멋있었다. 
그렇게 잘 생기고 세련되고 여자를 배려하는 매너를 갖춘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이 멀어 버린 것이다. 
 
3학년이 되면서 그가 약간 변하였다. 
하루는 담배를 끊겠다고 말하였다.
새삼, 
 
“몸에 해로운 담배를 왜 피우지요?”
 
라고 물었을 때, 그가 오히려 나에게 물으며 한 말이 기억났다.
 
“저는 왜 여자들이 담배를 피우는지 모르겠어요.”
 
“남자는 되면서 여자는 안된다는 거예요?”
 
나의 반문에 그가 말했었다.
 
“몸 상하는 담배를 왜 피우냐고요, 여자들이··· 
남자들은 그럴 수밖에 없지만···”
 
“······.?”
 
“여자는 눈물이 있지 않습니까. 슬프면 울면 되잖아요. 남자는 울지 못합니다. 울어서는 안되지요. 그래서 담배를 피워요. 눈물을 연기로 내보내는 겁니다. 남자는···”
 
그랬다. 
그런 그가 담배를 끊겠다고 한다.
 
“고시공부를 시작하렵니다. 담배를 끊고서요. 눈물 흘릴 일을 만들지 말아야겠어요.”
 
그리고 그는 책을 싸들고 절간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때는 그런 것이 유행이었다. 
나는 교회에 나가 그의 합격을 기도하였다. 
애가 타는 것은 늘 내 쪽이었다. 
가끔 절에서 내려온 그를 만나는 것은 가뭄에 단비를 보는 것 같이 달콤했지만 부족하기만 했다. 
볼 때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고 핼쓱해져 있었다. 그것이 나를 더 애태웠다. 참을 수 없이 보고 싶을 때는 태백산 절간으로 그를 찾아가기도 하였다.
 
고시공부는 배고픈 사자와 싸우는 검투사와 같았다. 
죽이지 않으면 잡아먹힌다. 등장할 때에는 검투사의 영웅적인 모습에 관객들이 환호하지만, 싸움이 치열해질수록 지친 검투사는 초췌해지고 비참해진다. 관객들은 곧 그를 야유한다. 무릎을 꿇는 순간 그는 사지가 찢긴다.   
그는 1차는 합격하였지만, 매번 2차에 실패하였다. 
다시 1년만, 1년만 하면서 대학시절이 끝나가고 있었다. 
어느덧 졸업을 맞이하게 되었다.
군대를 가야하는 그에게 이제 단 한 번의 기회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나는 초조해졌다. 
만일 또 실패한다면?
 
군복무 3년은 사랑의 무덤이었다. 꽃 같은 나이에 무작정 기다리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그 후의 희망도 절벽이었다. 
직업도 돈도, 든든한 빽도 없는 3무인생의 그를 사랑 하나로 받아들이기에는 세상은 너무도 차가웠다.
부모님의 눈치도 달라졌다. 
부모님은 최광호의 마지막 한 번의 기회를 기대하면서도 만일을 위한 결단을 준비하라는 식이었다.
 
그 때, 영재형.   
그 형이 나를 은밀히 보자 했다.
영재형은 우리 과 복학생이었다. 1류 명문고에 재력이 단단한 집안에 명석한 두뇌로 과의 리더였던 형이다. 
‘오빠’라는 끈적거리는 호칭이 아닌 ‘형’은, 담백하면서도 친근한 존경을 표현할 수 있어 여학생들은 모두 그렇게 그 형을 불렀다. 
 
그 형의 고백은 놀라웠다. 
복학하여 나를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그러나 강의실 앞에서 최광호에게 납치당하는 나를 보면서 실망과 상처를 받으며 그저 멀리서 나를 지켜만 보았노라고 했다.
행여 둘 사이가 멀어질 때를 기다려 봤지만, 이제 더 기다릴 수 없다고 했다. 독일로 유학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하고 결혼하여 같이 독일로 떠나고 싶다고 했다. 진정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리고, 최광호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자기가 그를 설득하겠노라고 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영재형은 조건이라면 최적의 신랑감이었다.
참으로 난처하였다. 
연애는 최광호와 하다가 결혼은 신영재?···
어떻게 최광호를 배신한단 말인가? 더구나 고시에 낙방하여 가장 어려운 처지에 있는 그 불쌍한 남자를···
인간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막연한 사랑의 낭만 때문에 엄연한 현실의 행복을 저버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 것만 같기도 했다. 
신영재는 무조건 최광호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누가 더 송원희를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마음이 흔들렸다···
 
최광호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우연을 가장하고 우리 셋은 함께 만났다. 나도 두 남자의 자세를 지켜보고 싶었다.
최광호는 창백한 얼굴로 나타났다. 
신영재는 긴장한 얼굴로 나타났다.
두 남자는 어색하지만 인사를 나누었다. 
신영재가 먼저 본론을 이야기 하였다. 
 
“송원희씨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송원희의 행복을 책임지실 수 있습니까?···”
 
신영재는 ‘사랑이란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기는 끝까지 송원희를 책임질 것이니, 자기에게 사랑을 양보할 수 없느냐고 했다.
자기 또한 송원희를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해 왔노라고 했다. 
송원희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자기에게 양보해달라고 했다. 
그는 최광호에게 고개를 숙이며 간절히 말했다.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최광호는 신영재의 말을 경청하였다. 아무런 대답 없이 그의 말을 듣고만 있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양보라고 했습니까? 송원희씨를 책임질테니 양보해달라고 하셨습니까?···”
 
최광호는 말했다. 
‘양보’란 그렇게 쓰는 단어가 아니라고.
‘양보’란 강자가 약자에게 하는 것이지, 약자가 강자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약자가 하는 양보는 ‘굴복’일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약자라고 했다. 아무 가진 것도 힘도 없는 약자인 자기가 어떻게 강자에게 ‘양보’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양보’할 수 없다고 했다.
 
최광호는 ‘사랑이란 지켜주는 것’이라고 했다. 
자기는 끝까지 송원희의 행복을 지켜줄 것이라고 했다. 송원희의 선택을 지켜주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만일 송원희가 신영재를 선택한다면 자기는 두말없이 사라져 두 사람의 행복을 기원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신영재에게 물었다. 
당신도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그의 눈빛은 동물처럼 빛났다. 
 
신영재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다.
그러면서 두 남자는 나에게 둘 중의 한 사람을 이 자리에서 선택하라고 했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결단을 내려야 했다. 
여기서 망설이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비겁한 배신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최광호의 옆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동시에 신영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문을 열고 뛰어나가는 그의 뒤를 쫒아갔다. 
코트의 어깨 깃을 고쳐 세우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남자의 어깨가 그렇게 좁게 보일 수 없었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그는 우산도 없이 그렇게 떠나갔다. 
 
최광호는 죽기 살기로 고시 공부에 매진하였다.
내가 연락하여도 만나주지 않았다. 
1년이다, 하면서···
 
그러나 1년 후···
그는 또 낙방하였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내 인생이 밑이 보이지 않는 절벽에서 끝나는 것만 같았다. 
암담하였다. 차라리 내가 고시에 낙방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심정이 이러니 그는 오죽하랴. 
그를 만났지만 최광호는 말이 없었다. 내 손만 꼭 잡을 뿐이었다. 
 
부모님은 성화였다. 신영재를 버린 나를 노골적으로 책망하였다.
 
그리고, 2개월 후 최광호는 편지 한 장을 보내왔다. 
나를 끝까지 지켜주겠노라고···
그래서 하루 빨리 군에 갔다 오겠노라고···
 
나는 한없이 울며 그를 원망하였다. 배신당한 느낌까지 들었다.
이것이 지켜주는 모습이냐고 따지고 싶었다. 
역시 사랑은 책임지는 남자의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도 최광호가 못견디게 그리웠다···
 
그가 입대한 후 6개월이나 지났을까.
눈물샘도 말라, 야윈 내 뺨 위로 흐를 눈물도 더 이상 없어졌을 때, 느닷없이 집에 찾아오는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문을 열었다. 
 
신영재였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아버지에게 넙죽 절을 하고는, 독일에서 유학하다 방학이라 들어왔다면서, 자기소개를 하고는, 내 팔을 잡고, 아버지에게 외치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제가 송원희씨를 독일로 납치하겠습니다.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부모님의 열화같은 재촉과 함께 나는 속절없이 독일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교회 웨딩마치에 행진을 하면서도 나의 뇌리에는 최광호의 창백하게 야윈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이국 땅 결혼식장에서 부모님께 절을 하며 눈물짓는 나의 모습에 같이 눈시울을 붉힌 많은 하객 중에 누가 내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을까···
최광호를 잊지 못하는 내 슬픈 마음을···
 
최광호. 최광호···
 
무슨 말을 할 것이며, 어떻게 할 수 있으랴···
나는 그에게 소포를 보냈다. 
 
‘월요 이야기’ 편지 파일을 포장하면서 나의 눈물은 편지속의 잉크를 온통 적셨다.
그리고 그가 나를 강의실에서 납치하던 날 선물했던, 작은 나무 군화 한 쌍을 동봉하였다. 
최광호는 이 모든 걸 이해하리라···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를 수없이 저주하였다. 
 
‘천벌을 받을 년, 배신자···’


7.

 
든든한 재력의 뒷받침 속에 세계적인 학자를 꿈꾸며 공부하는 신영재와의 화려한 해외에서의 결혼생활은 생각만큼 행복하지는 못하였다.
외국 땅에서 남편은 연구의 스트레스 외에, 외로운 타국생활에 가끔씩 망연히 있는 나를 볼 때에는, 최광호를 그리워하느냐며 의심하였다. 
소심한 그는, 만족스럽지 못하면 비관하기 일쑤였다.
 
아들, 딸 하나씩을 키우면서, 우리는 걸핏하면 다투고 갈등하였다.
‘아내를 책임지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대들면, ‘책임질테니 남편을 사랑하라’고 소리쳤다. 
돈도, 자식도, 출세도 부족함이 없었건만 나는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어느 날, 남편은 연구실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어 발견되었다.
과로사인지 자살인지, 나는 말하지 못한다. 
 
그 후의 나의 인생은 인생이 아니었다. 
아이들을 미국으로, 일본으로 유학시키면서, 또 통역과 번역 일을 하면서, 나는 유럽과 미국과 일본을 전전하며 살았다.
살기 위해 바빴다. 
시간에 쫒기며, 복잡한 해외 활동의 분주함 속에 최광호도 까맣게 잊었고, 한국도 까맣게 잊었다. 
복잡했지만 단조로왔다. 달리기만 했다. 
 
세월은 빨랐다. 
아이들은 이제 아들은 미국에서, 딸은 일본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이제 그들 인생의 거친 항해에 옆이든, 뒤든 돌아볼 여념이 없다. 
 
내 나이 어느덧 70세. 
 
주변에 아무도 없이, 색깔 다른 이들만 남았을 때, 고국이 생각났다. 나는 고국을 찾았다.
고국의 실버타운에 마지막 내 몸을 의탁하고 싶었다. 고국 하늘의 공기를 마시며 고국 땅에 묻히고 싶었다. 
 
신경이 쓰이지 않을 고급 실버타운을 물색하면서 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최광호의 고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월요 이야기’를 써서 보내 준 그 곳···
최광호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그의 숨결이 있었을 그 곳···
그래서 이 곳에 온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곳에서 최광호를···
 

8.
 

젊은 간호사는 간간히 바오로와 송원희를 관찰하였다. 
송원희는 바오로에게 무슨 시그널을 찾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바오로는  송원희의 그런 내심을 전혀 못 읽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라고 이해되었다. 
바오로는 병명도 없는 희귀병 환자다. 기억력과 생명력이 급속도로 감퇴되고 있는 중이다. 
 
송원희는 오히려 이를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만일 그가 자기를 알아본다면 어떻게 눈을 들어 그를 볼 수 있겠는가.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랑의 배신자가···
 
최광호를 만난 후부터 송원희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최광호는 어떻게 변했을까?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예전의 그 모습이 남아 있을까?
나를 알아본다면 무엇이라 말할까?
 
그녀는 가슴이 소녀같이 두근거렸다. 
가능만 하다면 과거를 깨끗이 지워버리고, 백지 상태에서 옛날의 그 사랑을 다시 나누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광호가 나를 몰라봐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최광호의 동정부터 살폈다.
최광호의 일상은 루틴하였다. 
아침 산책, 식사, 물리치료, 자유시간, 또 산책···.
송원희는 자신의 스케줄을 최광호의 스케줄에 일치시켰다. 
자연히 둘이 마주치는 기회가 많아졌다. 
 
“샬롬··· 보케르 토브!”
 
송원희가 어느 날 아침 최광호에게 인사하였다.
히브리어였다. 
‘굿모닝···’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보아 천주교 신자임을 알고 해 본 인사였다. 
 
“보케르 토브. 샬롬!”
 
최광호 역시 반갑게 인사하였다. 
둘은 스스럼없이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참 맑아 보이시네요. 비누방울 풍선을 좋아하세요? 지난번에···”
 
“예. 좋아하죠. 풍선 속에 가끔 제가 사랑하는 사람 얼굴이 보이거든요.”
 
송원희는 가슴이 뜨끔했다. 나를 알아보는가?
 
“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풍선을 보면서 옛날 친했던 사람을 떠올리면 풍선 속에 얼굴이 보인답니다.”
 
“사랑했던 사람이 많았나 보죠?”

“······.”
 
침묵하던 최광호가 입술을 열어 조용히 말하였다.
 
“많은 사람을 사랑했지요. 딱 한 사람··· 
지금은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는 말을 머뭇거렸다. 나는 내친 김에 물었다.
 
“젊었을 적에는 어떤 일을 했어요? 직업이?”
 
“저요···. 
저는 가톨릭 신부입니다. 젊어서 이제까지 40년간···”
 
신부? 
오, 최광호가 신부가 되었구나.
그간 독신으로 살았다는 것이구나···
송원희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나 때문이 아닐까? 사랑에 배신당한?···
 
“여사님은 어떤 일을 하셨어요? 히브리어로 인사를 하시는 걸 보고 살짝 놀랐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셨나 봐요.”
 
송원희는 대답을 피하였다. 그리고 재차 물었다. 
 
“왜, 신부님이 되셨어요? 이렇게 여쭈어 봐도 된다면···”
 
신부님은 조용히 말하였다. 
 
“하느님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지요. 저는 하느님을 사랑하니까요.  그리고 하느님도 저를 사랑하시니까요. 사랑은 지켜주는 것이니까요.”
 
송원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바로 이 남자였다. 
 
그녀는 간호사에게 몰래 그의 건강상태를 물어보았다. 
희귀병 환자. 최근의 기억력부터 감퇴하면서, 면역력이 떨어져 앞으로 1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오, 가엾은 사람. 
그래서 그런지, 그는 가끔 어제 만난 사람을 새삼스럽게 기억하지 못하는 증상을 보였다.
그것이 송원희에게는 다행이었다.
 
매일 새롭게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송원희는 그의 옛 사랑을 듣고 싶었다. 기억력이라 하지만 그의 이성은 또렷하였다. 그리고 예전 기억은 비교적 생생하였다. 
그는 송원희에게 매우 자상하고 친절하였다. 
 
송원희는 갑자기 세상의 모든 아침이 환하게 밝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생을 활기차게 하는 것인 줄 몰랐다. 
 
아침이 기다려지고, 입맛이 살아났다.
화장을 다시 시작하였다. 
그와 함께 있으면 시간이 멈추었다.   
70이 된 이 나이에 20대의 사랑의 감정이 되살아난다는 것이 기적처럼 신기했다.

 
9.

 
“신부님은 여자를 사랑하거나 용서해 본 적이 있나요? 
신부가 되시기 전에?···”
 
송원희가 아침 식사를 마치고 홍차를 잔에 타 주면서 바오로 신부에게 물었다. 신부님의 첫사랑 이야기는 누구에게라도 흥미있을 이야기거리이리라···
바오로는 빙긋 웃었다. 
 
“한 여자를 내 여자로 사랑한 사람이 하나 있었죠. 물론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그러니까 신부가 되어있는 것 아니겠어요? 
용서해 본 적은 없어요. 용서라는 것은 미움이 있어 비로소 생겨나는 마음이예요. 용서한다는 말은 미워했다는 말이지요. 저는 미워해 본 적은 없어요. 오직 사랑할 뿐이죠. 
더욱이 신부가 되고 난 후부터는···”
 
최광호···
거짓말. 
그에게 왜 사랑이 없었고, 미움이 없었겠어. 용서까지는 몰라도···
그렇지. 신부가 되고 난 후부터였겠지. 미움을 없앤 건··· 
그 전에는 나를 얼마나 미워했겠어?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겠어?
송원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배신한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나요?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는데··· 저는 사랑하지 못할 것 같아요.”
 
“그 사람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 사람과의 사랑을 사랑해야지요.”
 
“·········.”
 
바로, 송원희는 최광호 이 남자에게, 자기를 모르느냐고 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에게 50년 전의 첫사랑 송원희를 잊었느냐고 묻고 싶었다. 
용서받고 싶었다. 
당시의 일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그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싶었다. 그리고 50년 전의 사랑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의 마음의 빚에 정면으로 맞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바오로는 커피보다는 홍차를 즐겨했다. 그런 바오로에게 오늘도 홍차를 타 주면서 송원희가 물었다. 
 
“신부님, 신부님은 언제가 가장 슬플 때라고 생각하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렇죠.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가장 슬프겠지요. 그런데 죽기 때문에 슬픈 것은 아니겠지요. 이별이라는 것이 슬픈 것이겠지요. 이별이 슬픈 것은 아니겠지요. 사랑했기 때문에 슬픈 것이겠지요. 
사랑하는 것과 이별하는 것을 슬픔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그 이별의 슬픔은 더 커지겠지요.”
 
송원희의 가슴에 강물이 출렁거렸다. 
 
“신부님은 슬픈 적이 없었어요?”
 
바오로 신부는 송원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왠지 그 눈빛에 잔잔한 눈물이 비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빙그레 웃으며,
 
“왜 없었겠어요? 여사님은 없었습니까? 여사님도 있었겠지요.”
 
하였다. 
신부를 바라보던 송원희의 눈이 촉촉이 젖는 것 같았다. 
 
“그래요. 죽음이라 해서 다 슬픈 것도 아니고, 이별이라 해서 다 슬픈 것도 아니지요.”
 
왠지 남편 신영재가 생각났다. 송원희는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어느 때가 가장 기쁠 때일까요? 신부님?”
 
“하하하··· 그거야 슬픔과 이별할 때이겠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날 때···저는 하느님과 만나서 제일 기뻤습니다. 
요즘 매일 매일이 기쁘답니다.”
 
송원희는, 
 
‘이 남자가 정말 나를 몰라보는 걸까?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은 아닐까? 하느님 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제 복용한 약도 기억하지 못하는 바오로를 볼 때, 바오로가 송원희를 기억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고해성사를 하리라.’
 
송원희는 언젠가 바오로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통해 자기가 송원희였노라고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자 마음먹었다. 최광호의 말을 듣고 싶었다. 무슨 말이든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시간도 많이 남지 않았다···
 
아무튼 바오로는 간호사의 시중이 필요한 환자였다.
송원희는 아침마다, 또는 가능한 한, 바오로와 시간을 함께 하면서 그의 간호를 정성껏 도왔다.
하루하루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샘솟았다.

요양원의 의사나 간호사,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톨릭 신자로서 신부님을 지극히 섬기고 천국에 가고 싶어 그런다’
 
라고 말하였다. 
그녀의 바오로 신부에 대한 사랑의 헌신은 그렇게 이해되었다.
바오로 신부 또한 송원희의 지극한 보살핌을 기쁘게 여기며 조금도 마다하는 표정이 없었다. 
송원희는 하느님께 감사하였다. 
 
하루는 바오로 신부에게 송원희가 진지하게 말했다. 
 
“신부님. 죽기 전에 고해성사를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저의 죄에 용서를 빌고 하느님 곁으로 가고 싶어요. 고해성사를 하지 않고서는 지옥에 떨어질 것만 같아요. 죄 많은 제 고해성사를 받아주실 수 있나요?” 
 
바오로 신부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은퇴한 신부입니다. 성당의 다른 신부에게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소개해 드릴까요? 저는 못합니다.”
 
“아닙니다. 신부님. 꼭 신부님께 하고 싶어요. 신부님이 아니면 안될 것 같아요. 부탁입니다.”
 
바오로 신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면서, 
 
“정 그러시다면 제가 기도해 본 후 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하고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햇볕이 따스한 정원에서 휠체어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간혹 손을 맞잡기도 하면서 홍소를 터뜨리는 두 노인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두 노인이 사귄다는 소문이 의사와 젊은 간호사 사이에 은근하고 정겹게 퍼졌지만, 송원희는 개의치 않았다. 
70세 노인들의 은빛 사랑···
아름답지 않은가?
 
송원희는 행복하였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행복하였다. 둘이 나누는 일상의 평화롭고 조용한 대화가 너무도 행복하였다. 
 
“신부님, 이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은 말이 무엇인지 아세요?”
 
“‘사랑해’라고 하더만요.”
 
“맞아요. 신부님은 ‘사랑해’를 몇 개 국어로 할 줄 아세요?”
 
“영어, 일어, 라틴어, 히브리어 정도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사님은요?”
 
“저는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일어, 중국어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번 해 보실까요?”
 
둘은 번갈아 가며 사랑합니다를 각국어로 말하였다. 
 
“아이 러브 유(I love you), 아이시데루요(愛してるよ), 이히 리베 디히(Ich liebe dich), 워 아이 니(我 愛 你), 쥬 뗌므(Je t'aime), 아모테(Amo te), 아니 오헤부 오타흐 (אני אוהב אותך)”
 
“신부님. 마지막 히브리어로는 무어라고 하셨죠?”
 
“아니 오헤부 오타흐 ”
 
“뭐라고요? 다시 요”.
 
“아니 오헤부 오타흐”
 
“뭐라고요? 다시 요. 제 눈을 쳐다보고요···”
 
바오로는 ‘푸핫’ 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더니 천천히 송원희의 눈을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아·니· 오·헤·부· 오·타·흐”
 
송원희는 너무도 기쁘고 행복했다. 
송원희는 바오로의 귓불에 키스를 했다. 
송원희는 다시 간청하였다.
 
“신부님. 고해성사 받아주세요.”
 
“조금만 더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바오로가 송원희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여사님은 연애결혼을 하셨습니까? 중매결혼을 하셨습니까? 
사랑합니다라는 표현을 그렇게 많이 아는 걸 보니, 중매결혼은 아닌 것 같군요.”
 
생뚱맞은 이 말에 송원희는 잠시 기가 막혔다.
 
‘이 남자는 나를 확실히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글쎄 모르겠어요. 그것이 연애인지, 중매인지··· 
납치당해 결혼했습니다.”
 
“·········..”
 
바오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10.
 

바오로의 증세는 날로 악화되어 갔다. 
그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 놀라운 사실은 아니었다. 
그러나 송원희는 하루하루가 타들어가듯 안타까웠다. 
다행히 고통이 수반되지 않는 병이라 일상생활은 평온했지만, 기억력과 근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갔다.
송원희는 그럴수록 더욱더 바오로에게 다가가 지극히 간호를 하였고, 바오로는 감사하다는 말을 되풀이하였다. 
그리고 끝에 ‘하느님께’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11.
 

어느 이른 새벽이었다. 간호사가 송원희를 급히 찾았다. 
바오로가 찾는다는 것이었다. 송원희는 응급실로 달려갔다. 
바오로는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창백하고 핼쓱한 얼굴.
송원희의 눈에 고시공부하던 최광호의 창백했던 얼굴이 떠올랐다. 
두 얼굴이 오버랩되며 일치하였다.
 
침대로 달려가 바오로의 손을 잡자, 바오로는 간호사에게 커튼을 치고 나가라고 눈짓을 하면서 송원희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하였다. 
 
“고해성사를 하세요. 하느님이 허락하셨습니다.”
 
송원희는 하얀 백발을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바오로의 침대 밑에 무릎을 꿇고 그녀는 흐느꼈다. 상황을 이해 못할 바 아니었다. 그녀가 입술을 바오로의 귓가에 대고 어깨를 출렁거리며 말하였다. 
 
“너무 늦었잖아요. 이제는 너무 늦었잖아요.
신부님. 신부님.
저를 모르시겠어요? 저 송원희예요. 그렇게도 모르시겠어요?
당신, 최광호가 가장 어려울 때 배신하고 떠난 나쁜 년 송원희예요.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요.
그렇지만 저는 최광호씨 당신만 사랑했습니다. 
제 일생 딱 한번 첫 번째이자 마지막 사랑이었어요. 그것만은 진심입니다. 믿어주세요.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저를 용서하시고 천국으로 가세요. 저도 곧 따라 가겠습니다. 천국에서 우리 사랑 다시 나누어요. 
신부님, 아니 최광호씨,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송원희는 바오로의 손과 얼굴에 자신의 손과 얼굴을 포개며 엎드려 흐느껴 울었다.
이때, 바오로가 손을 움직거리며 송원희의 손을 더듬었다. 
그리고 송원희의 손바닥에 무엇인가를 쥐어주었다. 
송원희는 쥐어진 물건이 무엇인지 펴보았다. 
 
열쇠고리였다. 
나무로 만든 작은 군화 한 쌍이 매달린···. 
 
송원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부림쳤다. 
 
“최광호씨···신부님···최광호씨···
이미 아셨었군요···”
 
바오로는 손과 얼굴을 부비며 흐느끼는 송원희의 품속에서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 


12.
 

열쇠는 바오로의 사물함 열쇠였다. 
바오로의 장례식을 마치고, 송원희는 바오로의 사물함을 열었다. 
노란색 가죽 봉투에 두툼한 노트가 하나 들어 있었다. 
 
최광호가 송원희에게 써서 보내고, 다시 송원희가 최광호에게 소포로 보냈던  ‘월요 이야기’ 파일이었다.
그리고 파일 겉표지 위에 편지가 한 장 놓여 있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 죄 많은 종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느님의 사랑을 지키고자 종이 된 제가, 하느님만이 아닌 또 한 여자를 평생 못 잊고 사랑했던 이 종을 용서하시옵소서.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송원희 그녀를 못 잊어 신부가 되었고, 신부가 된 후에도 그녀를 못 잊어 죽기 전에 단 한번만이라고 좋으니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 이 죄 많은 종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DA 300


하느님의 사랑과 그녀의 사랑을 끝까지 지킬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를 끝까지 보호해 주소서.
그녀는 아무 죄가 없사옵나이다···
주의 종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아멘···.”
 
송원희는 편지와, 눈물에 얼룩진 월요 이야기 파일과, 나무 군화 한 쌍을 가슴에 안고 그 자리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7/10/13 [14:51]   ⓒ 대전타임즈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인기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